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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명 기사년 일기
자료번호 A-0012
생산자 윤봉길
발신자
수신자
생산연도 1929
수량 1건 1점
유형 서적류
규격(가로*세로*두께)(cm) 14.3x23, 펼침면 25.4
재질 지류
언어 국한문
디지털화여부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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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설명

'일기(日記)'라는 제목을 쓰고 "단군 4262년(1929년), 기사년 음력 1월 1일"을 부제로 달았다. 그가 다른 해에도 일기를 썼는데 남아 있는 것이 기사년에 쓴 일기뿐인지, 아니면 기사년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으나, 이듬해에  상해 망명을 결행하면서 중단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일기에서 자신의 나이가 21세가 되는 해를 동서양의 온갖 연호(年號)로 표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연호와 나란히 본인의 나이를 적어놓은 것도 '일기'가 갖는 성격에 기인한다. 고향의 집을 나와 상해로 출발하기 직전에 윤의사가 목도한 가장 큰 사건은 광주학생운동이었다. 그는 「일기」에 처음 '광주고보 민족충돌'(12월 5일자)이 일어난 사실을 적은 뒤 이틀 뒤에는 시위가 서울로 번져 보성학교에서 "1은 일본제국 타파 만세! 약소민족해방 만세! 노예적 교육 철폐 만세!"를 내용으로 하는 만세삼창'을 부르짖은 사실을 전하면서(12월 7일자) 서울에서 공부하던 종제 윤신득(尹申得)이 광주학생운동의 전국적 확산으로 인한 휴업으로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쓰고 있다(12월 12일). 돌아온 종제를 통해서 윤의사는 광주학생운동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을 것이다. 3.1운동 이후 최대의 대중투쟁으로 평가되는 광주학생운동 외에도 1929년은 벽두부터 일제의 식민통치를 뿌리 채 흔드는 투쟁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연초부터 3개월 이상 계속된 원산총파업을 비롯하여, 6월에는 목포상업학교의 조선인 학생들이 일인 학생과의 차별대우에 반발하여 동맹휴교를 일으켰으며, 6월에는 제5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50여 명이 검거되었다. 7월에는 경남 통영의 조선제강 여직공 200여 명이 임금인하에 반대하여 총파업을 일으키고 8월에는 부산 일본도기회사 직공 150여 명이 역시 임금인하에 반대하여 총파업에 돌입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12월 초 함흥수리조합의 일본인들이 조선인 3명을 타살했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윤봉길은 "아! 가엾어라, 이 압박 어느 날 갚을는지"(12월 16일자)라고 하면서 일제의 강압적인 식민통치가 더이상은 참을 수 없는 한계상황에 도달했음을 토로하였다. 「일기」는 그가 고향의 집을 나와 1930년 3월 6일에는 예산역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적는 데서 일단 끝난다.